[엄정권 기자] 가을, 제법 차가운 바람이 햇살을 나지막한 언덕으로 몰고 있다. 바람은 은행잎들 속에서 변주돼 노란색으로 빛나고 삼청동 아침은 거짓말처럼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바람보다 느린 햇살은 아스팔트를 더듬고 옷집을 돌아 카페 동네를 서성이다 돌담을 기어 올라간다. 햇살이 녹차 한 모금 음미하는 사이 단풍잎 하나 더 붉어진다.
오설록. 가운데 설(雪)자는 하얗기에 차갑고 녹(綠)자는 푸르기에 서늘하다. 먼 데 고향 제주를 그리는 것 같다. 앞 '오'자가 그나마 온기를 주는 것 같다는 상념을 해본다.
반듯한 네모 돌들이 가지런히 9층 기단으로 받치고 있는 한옥은 처마를 높이 들어 경쾌하고 몸집은 단아하다. 오설록 티하우스 삼청점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운영하는 오설록 티하우스로는 전국 9번째 집이다.
모두 3층으로 1층은 한옥을 개조해 몇 개 탁자와 카운터를 두었고 2, 3층도 비슷한 구조다. 다만 3층엔 좌식 탁자를 앉혀 색다른 모습이다.
1층 탁자에 앉으니 통유리로 된 전망이 밝다. 체로 거른 듯 맑은 햇살이 한 움큼 어깨로 쏟아진다. 창밖은 나뭇잎들이 몸을 부비며 온기를 나누는데 이곳은 따사롭다.
벽은 흰색이 도는 시멘트 벽돌이다. 토담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천장을 보니 정갈한 회칠 사이로 옹이도 야무진 서까래들이 단단한 근육질을 보여주고 있다.
차림표가 나왔다. 녹차 종류가 이렇게 많다니. 백가지는 넘을 것 같다. 망설이는데 동행자가 제주영귤 차를 추천한다. 폭이 좁은 나무판에 둥그렇게 찻잔 자리를 만들어 내 온 차는 오설록 문구의 종이 커버가 얹혀 있었다.
차 봉지가 속으로 매달려 있는 건 나중 알았다. 2~3분 기다려 커버를 열었더니 차 색깔이 불그레하다. 아니 차 색깔이 푸르지 않고…. 동행자의 설명이 이어진다. 후발효차 베이스 때문이라는 것. 붉은 색이 홍차 못지않게 맑고 깊이가 있어 보였다. 한 모금 물자 입 안에 따뜻한 청량감이 가득해지며 온 몸이 푸근해진다. 차에는 녹차로 만든 어린아이 새끼손가락 같은 과자가 따라 나온다. 구수하고 맛있다.
여기에 티 소믈리에가 있다. 처음 알았다. 티 소믈리에 지태호씨를 불러 앉혔다. 주문에 따라 차를 만들어 주지만 손님들이 차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차가 몽에 좋은지 물어보면 답한다고 한다.
요즘 같은 환절기에는 무슨 차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감잎차가 추천한다. 경력 1년이 조금 넘은 지씨는 블렌딩도 해준다. 평일에는 점심 무렵 손님이 많고 주말엔 외국 관광객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많은 편으로 깔끔한 녹차를 즐기고 특히 세작을 좋아한다고 지씨는 말한다.
오설록 티하우스는 일본인 관광객들에게는 필수 코스로 알려져 있다. 안내 책자에 등장할 정도. 그래서 오설록을 통해 한국의 맛과 멋에 빠진다는 것.
그러고 보면 녹차는 많이 대중화됐고 또 고급화하는 추세다. 사실 우리의 전통차 녹차는 커피에 밀리면서 명맥조차 희미했다. 그런 녹차를 오늘의 모습으로 이끈 것은 오설록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설록을 따라가다보면 오래전 제주의 황무지에 닿는다. 아모레는 화장품회사 사업으론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 속에도 제주도에 다원을 일군다.
30여년 전 제주 돌투성이 몹쓸 땅을 개간하면서 직원들은 손이 터졌다. 도로가 없어 기계가 들어갈 수 없고 전기 수도도 전무. 맨손으로 다원을 일으켰다. 지금의 제주 티뮤지엄에는 연간 50만명 이상 관광객이 찾고 있다.
서울 등 주요 백화점에 티숍이 들어가 있고 티하우스도 9개. 이렇게 보급하면서 우리 녹차의 진짜 맛을 비로소 볼 수 있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차로 발돋움했다. 스타벅스에도 원료를 공급한다.
한 모금밖에 안 남았지만 제주영귤의 온기는 아직 가득하다. 실내는 이미 녹차향이 차분히 내려앉아 더욱 고즈넉하다,
삼청동 오설록 티하우스, 걸어서 가보세요. 거기, 가을이 있어요.
-아름다움을 디자인하는 뷰티코리아뉴스-